慈遊到人(자유도인)

松巖 吾,謙螙. 무엇을 사유(思惟)하며 사는가?

만필 잡록(漫筆雜錄)

★ 일상적 사유(思惟)

☆ [讀後感想文] 『인간이 그리는 무늬』

松巖/太平居士 2020. 4. 2. 14:58

 

인간이 그리는 무늬(최진석)를 읽고...

이념·가치관·신념을 뛰어넘어 자가 자신으로 존재하는 일.

우리가 아닌 로 살기 위한 나의 무늬를 그리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를 대면 할 수 있는 재능 가운데, 가장 효과적인 것이 글쓰기입니다.

모두 잘 아시겠지만, 연애편지가 글쓰기 가운데 제일 어렵지 않나요? 왜 그럴까요? 아마 의욕이 넘치니까 그럴 거예요. 바라는 게 넘쳐서 할 말이 과잉되기 일쑤죠. 할 말 이전에 우선 감정이 극도로 부풀어져 폭발 직전이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연애편지는 잘 써질 수가 없어요. 그래서 기막히게 잘 쓴 연애편지는 대개 나를 대신하여 남이 써준 것입니다. 대신 써주는 사람은 평정심을 유지할 수가 있겠죠. 자기 일이 아니니까요.

글씨는 뇌의 흔적입니다. 대뇌가 지배하는 생리작용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글을 쓴다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일입니다. 몸속에만 머물기 버거운 영혼이 밖으로 뛰쳐나온 것. 그것이 바로 글이죠. 글은 솔직하게 써야 제대로 써집니다. 진실하게 텅 빈 마음으로 자기를 드러나게 할 때라야 제대로 된 글이 나오죠. 그래서 힘이 잔뜩 들어간 대낮에는 글이 잘 되지 않아요. 술이나 사회생활에 지칠 정도로 부대끼고 나서, 육신에 힘이 빠지고 온갖 것이 다 포기된 다음에라야 글이 잘 써지죠. 오로지 자기 자신만 고독하게 남은 새벽에 글이 잘 써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글을 쓰면서 사람들은 자신과 대면합니다. 이 점이 중요해요. 글이 잘 써지지 않는 것은 자신을 자기에게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글이 잘 써진다는 것은 자신이 자기에게 등장하여 잘 움직이고 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래서 문체(文體)의 차이는 바로 인격의 차이를 드러냅니다. 글쓰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을 대면할 수 있는 훌륭한 재능 하나를 버렸다는 말과 같습니다. 자신을 만나고 싶은가요? 글을 써 보세요.

꿈을 이루고 싶은가요? 자신과 약속하세요. 자신과의 약속은 생각으로만 되지 않습니다. 글로 쓰면 자신과의 약속이 더 선명해 집니다. 이루고 싶은 꿈을 생각으로만, 말로만 하지 말고, 글로 써 놓으십시오. 인간은 글을 쓸 때 자기를 만납니다.

글쓰기로 자신을 단련하면서 사는 사람은 그냥 바라보기만 해도 삶에 윤기가 흐르는 걸 볼 수 있습니다.

 

 

더듬이통찰력입니다

 

사업하는 사람들의 특별한 점은 자신들이 한 결정이 곧바로 자신의 승패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큰 부자가 되는 일도 한순간에 망해 버리는 일도 한순간의 선택이 결정해 버립니다. 사업가들은 매번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는 것입니다. 항상 생()과 사()의 경계선에서 긴장하고 있기 때문에 예민함이 살아 있습니다. 당선되기 전의 정치인들에게도 이런 경우가 있긴 하지만 정치인들의 긴장감은 당선되자마자 사라집니다. 매월 급여가 꼬박꼬박 지급되는 공무원이나 의원들이나 평화시대의 군인들은 예민한 감각이 살아있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판단이나 결정이 조금 잘못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바로 자신의 승패가 결정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실수해도 월급은 나옵니다. 일반 회사라면 바로 잘리겠지만...

()과 사()의 경계에서 민감성을 유지하는 사람들은 고도의 감각이 발달되어 있습니다. 사업가들은 고도의 더듬이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이 더듬이를 가지고 이론적으로 정리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을 거의 정확하게 압니다. 돈이 되는지 안 되는지를 귀신같이 압니다. 사업가들은 의사 결정을 할 때, 논리를 따지거나 분석을 하기 보다는 바로바로 판단을 내립니다. ‘더듬이통찰력입니다. 세상사의 거의 모든 일은 딱 보고 알아야 합니다. 생각하기 시작하면 대개는 꼬여 버립니다. !’하고 알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리더의 특징은 조짐을 읽는 능력先見之明

 

어떤 상황에 대해 좋다아니면 나쁘다

맘에 든다아니면 맘에 안 든다

둘 중에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면

아직 리더로서 준비되지 않은 것입니다.

리더는 좋다’ ‘나쁘다판단하기 전에 질문을 합니다.

세상에 무슨 변화가 있기에 이런 일들이 일어났지?

질문하는 데서 새로운 현상의 조짐을 깨닫게 되지요.

조짐을 읽는 능력즉 선견지명(先見之明)으로 세상을 이끌고 갑니다.

 

 

「∼인 것 같아요

 

맛 집을 소개하는 TV프로그램에서, 출연자가 음식을 먹고 맛있는 것 같아요.”라고 말하더군요. 이런 예는 숱하게 많습니다. 휴가철 피서객을 인터뷰하는 뉴스를 보면, 대개 이렇게 말합니다. “날씨는 더운 것 같지만 이렇게 피서를 오니 즐거운 거 같아요.” 영화를 보고 나서도 이 영화, 참 슬픈 것 같아요.”라고 말을 합니다.

재미있는 것 같다. 맛있는 것 같다. 더운 것 같다. 즐거운 것 같다. 슬픈 것 같다. 대체 이런 말들이 가능한 겁니까? ‘뭐가 즐거운데? 뭐가 맛있는데?’ 라는 추궁이 두려워서 확실한 결정을 회피하는 말투를 쓰는 것이라면 책임을 면하기 위한 비겁한 변명일 뿐입니다. 더 큰 문제는 자존권(自存權)의 결핍입니다. 내가 재미있으면 누가 뭐래도 그냥 재미있는 겁니다. 날이 더우면 더운 거고, 맛있으면 맛있고, 즐거우면 즐겁고, 슬프면 그냥 슬픈 거예요.

같다는 말은 추측, 불확실한 단정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컨대 비가 올 것 같다.”라든지 어쩐지 그 사람이 내 곁을 떠날 것 같다.”라든지 이렇게 추측하거나 불확실한 마음을 드러내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즐거운지, 재미있는지, 슬픈지하는 것들이 추측하는 것입니까? 그게 불확실한 것입니까? 지금 내가 즐겁고 재미있는 것이 추측해서, 또는 불확실하니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서 결정을 내리는 상태입니까?

이건 지금 자기가 느끼고 있는 가장 원초적이며 단순한 사실인 즐거운지, 재미있는지, 슬픈지를 자기가 모르는 것입니다. 이런 단순한 생각조차 추측해야하고 불확실한데, 지금 자기가 뭘 원하고 있는지, 뭘 하고 싶은지를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감을 갖고 나를 위해 사세요.

 

 

로 존재 한다

 

당신에게 신중하게 묻겠습니다.

 

당신은 바람직한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아니면 바라는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당신은 해야 하는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아니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당신은 좋은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아니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바람직함’ ‘해야 함’ ‘좋음등은 우리의 것으로 존재하면서 를 지배하는 것들 입니다.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적용되도록 재단된 이념이고 기준입니다. 이 기준을 정할 때에 당신은 직접 참여해 본 적이 있습니까? 왜 자기가 참여해서 정하지도 않은 것을 위해 헌신(獻身)해야 합니까? 왜 그것을 자신의 생각보다 더 수준이 높은 것으로 보십니까? ‘바람직함’ ‘해야 함’ ‘좋음등 만 강조되는 사회라면, 그 사회는 단일한 기준으로 관리되고 통제된다는 뜻입니다. 하나의 기준만을 가진 사회, 참 삭막하고 답답합니다. 우리사회가 창의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사회로 진입하려면 바람직함’ ‘해야 함’ ‘좋음대신에 자신이 원하는 행동과 생각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바람직한 것 보다는 바라는 것을 하는 사람, 해야 하는 것 보다는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사람, 좋은 일 보다는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 채워질 때, 우리사회는 상상력과 창의성이 풍부한 부드러운 사회, 건강하고 행복한 사회가 됩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우리'가 느끼는 겁니까? ''가 느끼는 겁니까? 행복을 느끼는 주체는 누구인가요? 나예요.

'우리'라는 집단은 느낌을 함께하기 어려워요. 집단은 이성이 지배합니다. 철저한 계산아래......

우리라는 우리에 가두지 마세요.

 

 

자유와 행복을 창조하자

 

왜 나는 자유에 대한 지식만 쌓지

정작 내 자유로운 삶을 생각하지 못할까?

당신은 지식이 증가하고 경험이 늘어남에 따라서

더 자유로워졌습니까?

 

왜 나는 행복에 대한 지식만 쌓지

정작 내 자신의 행복한 삶을 실천하지 못할까?

당신은 지식이 증가하고 경험이 늘어남에 따라서

더 행복해졌습니까?

 

왜 나는 상상력과 창의성에 대한 지식만 쌓지

정작 내 상상력과 창의성은 갖질 못했을까?

당신은 지식이 증가하고 경험이 늘어남에 따라서

더 상상력과 창의성이 늘어났습니까?

 

나의 지식과 이념과 신념의 정체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내 인생을 항해 할 힘을 갖길 바래본다.

 

 

하고 싶은 말 안하기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고 참을 수 있을까요? 생각해 보세요. 거의 불가능 합니다.

누구나 불가능 하다는 것을 알 겁니다.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정도는 누구나 교양으로 알지요.

그러니까 말을 하면서 꼭 너만 알고 있어라.” “이거 말하면 안 되는데......”라는 말을 붙이는 거겠지요?

이건 비밀인데 알려 드릴까요? “꼭 너만 알고 있어라.”라고 주의를 당부하면서 하는 말은 세상 사람들이 반드시 다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몰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말을 하지 않는 게 제일이에요.

어쨌든 하고 싶은 말을 안 할 수 있다면, 이건 대단한 내공 이예요.

하고 싶은 말을 안 할 수 있는 사람이 정도가 되면 단순히 인격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아니라

거의 성인(聖人)의 반열에 드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혼자 있어 보고 싶다고요?

 

일에 지친 사람들은 가끔 이런 말을 합니다. “휴대전화도 끄고 TV도 없이 어디론가 떠나서 혼자 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 해 보셨죠?

그런데요, 혼자 편안한 상태로 몇 날을 보낸다? 그게 과연 말처럼 쉬울까요? 편안히 몇 날을 보낼 수 있는 사람, 엄청난 수양이 된 사람이에요.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에요. 매일 시간에 쫓겨 산다고 투덜대지만, 막상 시간을 주었을 때, 아무런 마음의 혼란 없이, 외롭지 않게 긴 하루를 오롯이 보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혼자 있어 보고 싶다고요? 혼자 있기 어렵습니다. 혼자 한번 조용히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고 싶다고요? 혼자 조용히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을 겁니다. 주변 여건이 안 좋다는 게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 잘 감당을 못할 거예요.

자기가 독립적 자아(自我)로 성숙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혼자 있는 것을 버거워 할 수밖에 없습니다. ? 사실은 자신이 만든 어떤 틀에 의해 지배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집단의 이념이 지배하는 우리에서 나를 구해내야 합니다. 우리는 나를 가두는 우리입니다. ‘우리를 탈출하면 나를 짓누르는 힘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생기고, 자존권(自尊權)을 지켜내어 창조적 자유를 맘껏 누릴 수 있어요.

 

*** 자존권(自尊權) : 스스로 품위를 높여 생존에 필요한 행위를 할 수 있는 자기 보존권

 

 

일상(日常)으로의 초대

 

현대사회에서 가정주부들이 왜 그렇게 무시를 당했나요?

가정일이 가치를 부여받지 못했기 때문이죠.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등의 집안일 따위는 별거 아니라는 거예요. 그럼, 가정일 말고 가치 있는 진짜 일은 무엇이냐? 완벽하다고 착각하는, 사회적인 관념과 철학적 이념이 제일이었어요. 이렇게 되면 구체적 일상(日常)에서 벌어지는 일 따위는 그저 하찮은 것들로 치부 될 수밖에 없어요. 그 하찮은 일들로 이루어진 것이 가사노동 아니겠습니까? 긴 세월 동안 일상(日常)이라는 것은 형편없는 인간들이 하는 것이었어요. 왜 일상(日常)이 가치를 부여받지 못하는가? 추상적인 관념이나 완벽하다고 하는 철학적 이념에 견주어 볼 때 일상(日常)에 무슨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세상은 이런 하찮게 보이는 일상(日常)의 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회 민주화를 위해서는 목숨 걸고 투쟁할 수 있지만, 가정에서의 민주화는 참 어렵습니다. 인간은 대개 일상(日常)에서 좌절합니다. 행복도 일상(日常)에 있습니다.

일상(日常)의 힘과 가치를 무시하고, 거대한 철학적 이념의 가치에 매몰되어 있는 한 쉽게 독재의 틀이 형성됩니다. ? 행복을 관념·이념이 책임지려하기 때문입니다. 행복을 철학적 이념으로 정해 놓고, 그 이념적인 행복을 추구하게 만드니까요. 즉 국민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 놓고, 국민들을 그 속에 집어넣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독재 아니겠어요? 가정도 마찬가지겠죠. 우선 풍족하게 살 수 있는 가정을 만들어 놓고, 가족들을 그 속에 억지로 집어넣으려고 한다면 그 가족 구성원들이 행복할까요? 가정 독재의 틀이 형성된 거지요.

정상적인 가정(나라)이란, 행복하게 만들어 놓은 가정(나라)에 가족(국민)들을 수용하여 행복한 삶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한 가족(국민)들이 모여서 행복한 가정(나라)이 되는 것입니다. 거듭 강조하건대, 행복한 개인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사회가 진정으로 행복한 사회입니다.

철학적 이념에 주도권을 넘기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념과 가치관을 그대로 추종하지 않고, 오히려 저항하면서 자신이 사유(思惟)하는 대로 뚜벅뚜벅 가는 것이지요.

내가 사는 것은 일상(日常)인가요? 아니면 이념인가요? 일상(日常)이지요. 우리가 우리를 지키는 힘이 발휘되는 공간은, 철학적 이념의 세계가 아니라 구체적 일상(日常)의 세계예요.

 

 

죽어가는 일

 

나도 당신도 금방 죽습니다.’

느닷없이 죽음을 운운하니까 기분이 묘하고 가슴이 아린가요?

하지만 이보다 더 분명한 사실은 없다는 것에 아마 거의 동의하실 겁니다.

삶의 밑자락에 흐르는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처음 알게 된 것처럼 망연자실하며, 한 순간에 밀려오는 싸늘한 이 느낌은 아마 깨달음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죽음에 관한 생각그 순간의 느낌을 계속 잡고 있으면 삶의 질은 매우 높게 계속되고, 태도는 진중(珍重)하며, 중후한 거동과 통찰의 힘을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느낌이 5분 이상 지속할 수 없음을 우리는 다 압니다. 그럼 왜 숙연함이 유지되는 시간이 그렇게 짧을까요? 그것은 존재하지도 않는 죽음에 잠시 충격을 받았기 때문일 겁니다.

죽음! 이 세계에 죽음은 존재 하지 않습니다. 원소의 구성이 변화하는 것일 뿐이죠. 죽음은 개념이지 구체적 실재(實在)가 아닙니다. ‘죽어가는 일즉 변화하는 사건이 있을 뿐이죠.

죽는 일은 일상(日常)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죽어가는 일을 직시(直視)하길 바랍니다.

 

 

세상보다 자신을 사랑하는 힘

 

'나라를 위하는 사람'이 윤리적인 행동을 하겠습니까? 아니면 '자기를 위하는 사람'이 윤리적인 행동을 하겠습니까? 자기를 위하는 사람이 윤리적인 행동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뇌물을 받아 왔나요? 나라를 위하는 사람은 뇌물을 받아요. 당을 위하는 사람도, 자기 계파를 위하는 사람도 뇌물을 받아요. 자기 계파를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받는 거예요. 자기가 받는 것이 아니라고 스스로 착각을 만들어 내지요. 그런데 나라든 당이든 자기 계파든 그런 것들을 위하지 않고, 자기를 위해서 사는 사람은 뇌물을 받으면 자존(自尊)을 해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자기 존엄이 파괴되는 일 이란 걸 아는 거지요. 그래서 그 유혹을 거절할 힘이 있는 겁니다.

자기를 나라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덕()이 있고 윤리적입니다. 나라를 자기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덕() 대신에 이념(理念)이 있어요. 자기 활동의 추진력을 이념에서 구한다면, 거기에는 자기가 존재하지 않아요. 자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 존엄에 대한 의식이 없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어떤 행동을 해도 부끄러운 줄 모르지요.

선거 때 자기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국가와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겠습니다.”라고 하는 사람은 절대 믿지 마세요. 선거만 끝나면 끝이에요.

 

貴以身爲天下 若可寄天下(구이신위천하 약가기천하)

愛以身爲天下 若可託天下(애이신위천하 약가탁천하)

세상보다 자신을 귀히 여기고 사랑한다면, 세상을 맡겨볼 수 있다.

이와 반대로

자신을 바쳐 세상을 사랑하려 한다면, 어찌 세상을 맡길 수 있겠는가?

노자의 말입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힘'이 자신을 행복하게도 하고 윤리적이게도 하고 심지어 사랑스럽게도 하고 돈도 벌게 해준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질문이 왜 중요할까요?

 

이것저것 많이 배웠다는 사람이 대답만 할 줄 안다면, 이건 바보입니다. 왜 바보일까요? 자기의 견해(見解)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자기의 견해는 언제 존재합니까? 바로 질문할 때 존재합니다. 질문을 하려면 무엇이 있어야 하죠? 일단 호기심이 있어야 돼요. 그 호기심을 한번 내뱉어 보는 일, 이것이 질문이에요. 질문하는 곳에는 자기의 견해가 존재합니다. 반면 대답만 하는 곳에는 자기의 견해 존재하지 않아요. 이미 만들어져 있는 지식을 섭취해서 누군가가 요구할 때 그대로 뱉어내는 것, 이것이 대답이에요. 대답의 과정 속에 주인자리는 지식이 차지합니다. 자기 자신은 타인이 제작한 지식의 보관창고나 유통경로 정도일 뿐이죠. 자기가 우리라는 집단속에서 벗어나 자기의 주인으로 살아 있을 때 질문이 가능합니다.

대답만하는 인재로 길러지면 결과가 어떨까요? 호기심도 문제의식도 생기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꿈이 사라지고 자기가 원하는 것이 모호해질 때 상상력이 사라져버립니다. 이런 현상이 산업으로 연결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끔찍하지요? ‘대답 잘하는 일질문 잘하는 일사이에는 엄청나게 큰 간극이 존재해요. 앞으로 대답하는 인재보다 질문하는 인재가 많아져야 문화와 정치와 산업이 서로 화합하는 발전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질문을 할 줄 모르는 이런 답답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어릴 때부터 스스로 자유롭게 생각하고 토론하는 문화를 정착시켜야 합니다. 꽤 어렵겠지요?

왜 토론이 되지 않을까요? 할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할 말이 없을까요? 문제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문제의식이 없을까요? 세상에 대하여 호기심이나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호기심이 없을까요? 자기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독립적 주체로 우뚝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배운 대로 움직이기만 하려고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주체가 독립적이지 못하면 자신만의 생각으로 세상을 마주할 힘이 발휘되지 않습니다.

질문이 왜 중요할까요? 질문하는 능력은 단순히 대답과 질문 사이의 문제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질문하는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하는 것은 바로 독립적 주체를 회복했는지 못했는지 하는 문제와 곧장 연결됩니다. 인격적으로 성숙된 독립적 주체라야 지식을 지혜로 승화시킬 수도 있지요. 지식이나 이념을 뚫고 나온 독립적 주체라야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꾸려나갑니다. 거리낌 없이 자유를 누립니다. 타인과 공감할 수 있는 힘을 발휘합니다. 상상력도 세상과의 관계에 대한 질문에서 싹을 틔웁니다. 창의성도 바로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질문도 없이 어떻게 새로워질 수 있겠습니까? 질문은 그 사람의 수준을 반영합니다.

 

THE G20 SEOUL SUMMIT 2010

*** 우리나라 지식인이라는 기자들도 질문을 할 줄 모른다.

201011G20 정상회의 폐막기자회견 때

미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 기자만 특정해서 질문권을 줘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나라망신을 시키는 모습을 보며

내 얼굴이 화끈거리던 생각이 난다.

끝내 한국기자들 중에 아무도 손을 들지 않자

Anybody? 오바마 대통령이 짖던 어색한 미소가 기억에 남는다.

 

*** 나는 명쾌한 답변에 감동을 해본적은 없어요.

~ 그렇구나!’ 정도라고나 할까요.

하지만 예리한 질문에는 입을 따악 벌리고 감탄을 해요.

아니~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해서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까?

~ 보통내기가 아니구나!‘ 존경심이 저절로 생겨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