慈遊到人(자유도인)

松巖 吾,謙螙. 무엇을 사유(思惟)하며 사는가?

만필 잡록(漫筆雜錄)

★ 일상적 사유(思惟)

☆ [讀後感想文]『무기가 되는 철학』

松巖/太平居士 2020. 1. 3. 14:45

『무기가 되는 철학(山口周저)』를 읽고

철학을 배우지 않고 사회적 지위를 얻어 권위와 영향력이 생기면 위험한 존재가 된다.

 

 

공평한 사회일수록 차별에 의한 상처가 깊다

 

공정하고 공평한 것은 정말로 좋은 것일까?

만약 사회가 공정하고 공평하다면 그중에서 하위층에 위치하고 있는 사람은 스스로 미음의 상처를 치유할 길이 없다. 사회 제도나 인사 제도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신의 재능과 노력, 그리고 외모 면에서 남들보다 열등하기 때문에 하위층에 있다고 밖에 해석되지 않기 때문이다. ‘서열의 기준이 정당하지 않다’ 혹은 ‘기준이 정당해도 평가가 공정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라는 믿음 덕분에 우리는 자신의 열등성을 부정할 수 있다. 하지만 공정하고 공평한 사회에서는 이와 같은 자기방어가 성립되지 않는다.

 

우리가 이상(理想)으로 내건 ‘공정한 세상’이 실현되었음에도 ‘당신은 뒤처져 있다’고 평가받을 많은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해야 자기 존재를 긍정적으로 인식할 수 있을까? 공정이라는 개념을 절대적인 선(善)으로 받들기 전에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태어날 때부터 사회적 신분이 정해져 있던 조선시대에는 하위층에 속해 있는 개인은 상위층에 있는 사람들과 비교하지 않기 때문에 부러움도 열등감도 느끼지 않았다. 애초에 ‘비교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분 차별 제도가 철폐되고 민주주의 사회가 실현되었어도 차별과 격차는 근절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조선시대보다 차별과 격차는 음습하고 심각한 문제로 우리 사회를 좀먹고 있다.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이유는 단순하다. 표면적으로는 신분이 없어지고 누구에게나 기회가 공평하게 주어졌기에 오히려 차별이나 격차가 더 부각(浮刻)된 것이다. 자신과 비슷한 출생 환경이나 능력을 가진 사람이 높은 계층에 올라가 있는데 나는 그런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은 이상하다. 그 의문이 ‘공평성이 없다’는 생각으로 귀결된다.

사회 조직의 공정성이 높아질수록 격차나 차별로 인한 질투의 감정에 사로잡히고 상처를 받는다.

 

오해가 있을까 봐 덧붙이는데, 나는 결코 신분 차별 제도가 바람직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회사의 진급 평가 제도를 설계할 때 ‘공정한 평가’를 궁극적인 목표로 한다. 하지만 ‘본심은 그 누구도 공정 따위는 바라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특혜를 기대한다.

 

 

보이지 않는 노력도 언젠가는 보상받는다는 거짓말

 

힘든 고난 속에서도 꾸준히 성실하게 노력하면 언젠가는 보상받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대체로 세상은 공정하며 실제로 그렇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노력은 반드시 보상받는다고 천진난만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의 얘기는 근거가 너무나 취약하다. ‘재능보다 노력’이라고 주장하는 수많은 책에 나타나 있는 공통된 특징은 일부 천재성 있는 사람들의 노력을 관측한 결과만으로 결론을 짓고 있다.

노력의 많고 적음에 따른 성과의 차이는 ‘악기연주 21%, 스포츠 18%. 교육 4%, 지적 전문직 1%’라고 한다. 이 수치를 보면 ‘재능 없는 노력’이 얼마나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위험한 주장인지 알 수 있다.

노력은 반드시 보상받는다는 주장은 매우 아름답게 들린다. 하지만 그것은 바람일 뿐이고 현실세계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직시하지 않으면 의미 있고 풍요로운 인생을 살아가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섣불리, 노력은 언젠가 보상받는다는 사고에 사로잡혔다간 승산이 없는 일에 쓸데없이 인생을 허비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노력은 보상받는다는 거짓말에 사로잡히면 도리어 사회를 원망하게 될 수 있다는 점도 짚고 싶다. 논리는 항상 단순하다. 세상이 공정하다면 실제로 성실하게 노력하는 사람은 언젠가 발탁되거나 각광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현실세계는 공정하지 않기 때문에 남들 모르게 혼자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서 발탁되지도 않을뿐더러 각광을 받는 일도 없다. 그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날까? ‘세상은 공정해야만 하는데 이 사회는 공정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회는 도의적으로 잘못되었다’라고 생각하게 되고 결국 사회에 원한을 품게 된다.

“천재는 99%의 노력과 1%의 영감으로 이루어진다.” 발명왕 에디슨의 말이다. 사람들은 이 말이 ‘재능보다 노력’을 강조하는 말이라고 오해하고 있다. 에디슨의 주장은 아무리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다 해도 접근법이 잘못된 경우라면 아무리 노력을 한다 하더라도 결코 성공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다. ‘1%의 영감’이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세상은 결코 공정하지 않다. 그러한 세상에서 한층 더 공정한 세상을 목표로 싸워 나가는 일이 바로 우리의 책임이며 의무이다. 남모르는 노력이 언젠가는 보상받는다는 사고가 인생을 망칠 수도 있다는 것을 반드시 명심하자.

 

 

이상은 이상일 뿐, 환상에 사로잡히지 말라

 

이데아[Idea]는 인간이 감각하는 현실적 사물의 원형으로서, 모든 존재와 인식의 근거가 되는 것. 쉽게 표현하면 ‘상상속의 이상형’이다.

 

나무를 보고 ‘이것은 나무다’라고 쉽게 판단을 하지만,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는 전부 다르다. 아마 온 세상을 뒤져도 완전히 똑같은 나무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나무’로 인식한다. 그 이유를 우리가 ‘나무의 이데아’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가능할까?

 

어린아이에게 개와 고양이 사진을 보여주고 각각 구별하라고 하면 쉽게 할 수 있지만, 이 일을 인공지능에게 시키기는 대단히 어렵다. 컴퓨터는 어떤 조건에 해당하면 고양이로 분류하고 어떤 조건에 해당하면 개로 분류할지를 미리 규정해 두어야 판달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조건을 규정해야 하느냐가 문제인데, 바로 이점이 어렵다. 개와 고양이를 언어로 표현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현재의 인공지능에서는 ‘조건에 의한 분류’라는 접근을 단념하고 수많은 개와 고양이의 사진을 기억하게 해서 통계적으로 ‘이것은 개’ ‘이것은 고양이’라고 판단하게 하는 ‘기계학습’ 접근법을 채택하여 높은 정확도로 개와 고양이를 분류하고 있다.

인간이 개를 개라고 인식할 수 있고 고양이를 고양이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개와 고양이의 이데아를 갖고 있기 때문일까? 만약 이 주장이 옳다면, 컴퓨터에 대용량의 데이터를 기억시키는 미련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인공지능에게도 ‘개의 이데아’ ‘고양이의 이데아’를 심어놓으면 될 것이다.

 

정리하자면 현실적으로 검증할 수 없는 가상(假想)에 근거를 두고 사고하는 일은 소용이 없다. 공상 속의 개념에 농락당하지 않고 눈앞의 현실을 똑똑히 관찰하는 방법에 입각해서 사고(思考)해야 한다.

 

우리는 때때로 이데아에 사로잡혀 현실을 경시한다. 그 전형적인 예가 수많은 기업에서 채택하고 있는 목표관리를 위주로 하는 인사제도이다. 본래 설계한 의도대로 제 기능을 다하고 있는 회사는 실제로 본 기억이 없다. 회사의 인사제도는 이데아의 오류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다.

 

바람직한 모습의 이상향을 그리는 일은 전략을 세우는데 중요한 출발점이 되지만, 그 점에 지나치게 집착하면 불가능한 것을 무리하게 추구하는 함정에 빠질 수 있다는 위험성을 인식해야 한다.

 

 

오해에는 여러 유형이 있다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해서 새기는 오류

 

1. 독선

자신이 받은 교육과 경험이라는 편협한 범위의 자료를 바탕으로 단정해 버리는 오류다.

 

2. 불통

커뮤니케이션의 오류이다. 즉 ‘거짓말’이나 ‘전해들은 말’을 진실이라고 믿고 현혹된 오류다.

 

3. 편견

다양한 학설이나 잘못 증명된 법칙의 주장 등 권위와 전통을 아무런 비판 없이 믿는데서 생겨난 오류다.

 

4. 착각

이를테면 사탕을 먹은 뒤 귤을 먹으면 시게 느껴지는 것이 전형적인 착각오류다.

 

내가 주장하는 내용이 왜곡되어 있지는 않은가 돌아보아야 한다. 집요한 믿음은 설령 그 생각에 반하는 사례가 드러난다 해도 그 사례들을 무시하거나 경시하기 쉽다.

‘아는 것이 힘이다.

 

 

생각은 아웃소싱할 수 없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 명제는 원래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생각하지 않는 자(者)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라고 극단적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의미는 아니다.

「르네 데카르트」가 말하고자 한 것은 ‘존재가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하지만 모든 것을 의심하고 있는 나의 정신이 있다는 것만은 의심할 수 없다’라는 의미다. 데카르트는 왜 이처럼 자명한 일을 거창하게 언급했을까? 그는 당시 권위로 군림하던 기독교에 싸움을 걸며 ‘철저하게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라!’라고 외친 것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많은 노력을 들여 축적한 ‘진리에 관한 고찰’이 기독교에 의해 소실된 800여년의 ‘공백기’ 동안 철학뿐만 아니라 자연 과학과 문학 분야에서도 장기적인 ‘지적 정체’와 ‘지적 퇴행’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유럽에서 곤란한 일이 일이 발생했다. 가톨릭과 개신교(Protestant)에 의해 진리가 둘이 된 것이 문제였다. 서로 자신이 진리라고 내세우며 추잡한 싸움을 벌이는 어리석음을 목도한 중세 유럽사람들은 ‘이것은 어느 쪽이 옳은가 하는 문제가 아니다’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런 때야말로 전부 없었던 일로 하고 확실한 데서부터 다시한번 시작해보자’라는 생각으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외침을 꺼냈던 것이다.

신이나 교회라는 권위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진리에 다다를 수 있지 않을까?

그 여정의 결과를 제시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권위에 아부하지 않고 치밀하게 확인하면서 사고를 확장하고자 했던 파격적인 시도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때로는 판단을 보류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우리가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한번 ‘판단 보류’해 보면 어떤 점이 좋을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대화할 수 있는 여지가 넓어진다는 점이다.

지금 시대에는 대화의 가능성을 포기하고 대화의 자리 자체를 폭력으로 파괴하려는 사람들로 인해 절망하고 있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할 때, 자신에게 보이는 세상과 상대방에게 보이는 세상은 크게 다를 수 있다. 그때 양자가 자신의 생각에 강한 확신을 갖고 있으면 그 어긋난 차이가 해소될 가능성은 별로 없다.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다양한 일들이 서로 연결되고 맞물려 역동적으로 변화해 나간다. 그러한 사회에서 자신의 생각만이 객관적 사실이라고 믿는 것은 위험할 뿐만 아니라 윤리적으로도 문제가 있다. 애초에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그 생각을 확신하지도 말고 버리지도 않는, 중간 경과조치로 일단 잠시 멈추는 중용(中庸)의 자세가 지금 이 시대에 더더욱 필요한 지적(知的) 태도가 아닐까?

 

 

조급해하지 마라, 세상은 그렇게 갑자기 바뀌지 않는다

 

패러다임(paradigm)이란 사고(思考)의 틀. 한 시대의 사람들의 견해나 사고를 근본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인식의 체계를 말한다.

패러다임은 일반적으로 인정받은 과학적 업적을 토론하는 방법의 패턴을 알려주는 것이다. 원래는 과학 영역에만 한정적으로 사용될 것을 염두에 두었던 말이지만, 오늘날에는 패러다임이라는 말의 개념이 상당히 확대되어 과학 영역을 넘어 사회 현상이나 과학기술 응용과학 등 광범위한 영역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렇게 까지 된 까닭은, 다른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을 깔끔하게 설명하는 가장 적절한 용어이기 때문이다.

 

어떤 패러다임에서 다른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은 긴 세월에 걸쳐 일어난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받아들여지기까지는 그가 죽은 후 100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으며, 뉴턴의 만유인력도 발표 이후 반세기가 넘는 세월이 지나서야 가까스로 인정받았다.

우리는 그러한 발견을 계기로 세상이 단번에 뒤바뀐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오늘날에는 다양한 영역에서 단 몇 년 사이에 패러다임 전환이 거듭된다고들 말하지만 그것은 패러다임이 아니라 방법의 전환에 지나지 않는다. 시간 축을 길게 잡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자아실현을 이룬 사람일수록 인맥이 넓지 않다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설(慾求 五段階說 Maslow hierarchy of need theory)

• 1단계 : 생리적 욕구(Physiological Needs)

• 2단계 : 안전에 대한 욕구(Safety Needs)

• 3단계 : 소속과 애정욕구(Belongingness and Love Needs)

• 4단계 : 자기존중의 욕구(Esteem Needs)

• 5단계 : 자아실현의 욕구 (Self-Actualization Needs)

 

자아실현을 이룬 사람들은 고립적인 성향을 띠고 있으며 소위 인맥이 넓지 않다. SNS를 통해 점점 ‘얕고 넓어지는’ 우리의 인간관계를 돌아본다.

 

'자아실현을 이룬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 15가지'가 있다.

 

1. 소망, 욕망, 불안, 낙관주의, 비관주의에 기인해 예견하지 않는다. 미지의 것이나 애매한 것에 겁먹거나 놀라지 않고 오히려 흥미로워 한다. [현실을 더욱 효과적으로 지각하고 쾌적한 관계를 유지]

 

2. 마치 자연을 자연 그대로 무조건 받아들이듯이 인간성의 약점, 죄책감, 유약함, 사악함을 받아들일 수 있다. [자연을 비롯해 자신과 타자를 수용]

 

3. 행동, 사상, 욕구에 자발적이다. 행동의 특징은 단순하고 자연스러우며, 거짓을 꾸미거나 결과를 노리느라 긴장하는 일이 없다. [자발성, 단순함, 자연스러움]

 

4. 철학적, 윤리적인 기본 문제에 관심이 있으며 넓은 준거기준 속에서 살아간다.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일이 없다. 폭넓고 보편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거시적인 안목으로 일을 한다. [과제 중심적]

 

5. 혼자 있어도 상처받거나 불안해하지 않는다. 고독과 혼자만의 생활을 즐긴다. 이러한 초월성은 일부 사람들에게 냉정함, 애정의 결여, 우정의 부재, 적의로 해석되기도 한다. [초월성-프라이버시 욕구]

 

6. 비교적 생리적 환경과 사회적 환경에서 독립해 있다. 외부에서 얻을 수 있는 사랑과 안전에 의한 만족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자기 발전과 성장을 위해 자신의 가능성과 잠재 능력을 믿는다. [자율성-문화와 환경으로부터의 독립ㆍ능동적 인간]

 

7. 언제나 새로운 인식​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항상 신선하고 천진하게 인식하고 경외와 기쁨, 경이로움과 황홀감을 느낀다. [언제나 새로운 인식]

 

8. 신비로운 체험을 갖고 있다. 황홀함과 경이로움과 외경심을 동시에 가져오는 굉장히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이 일어났다고 확신한다. [신비로운 경험-최고의 체험]

 

9. 때로는 인류에게 화가 나거나 조바심이 나거나 싫증이 날 때도 있지만 그들에게 동정과 애정을 느끼며 도움을 주고자 한다. [공동체 의식]

 

10. 마음이 넓고 깊은 대인 관계를 유지한다. 소수의 사람들과 특별히 깊은 유대관계를 맺고 있다. 이는 자아 실현적으로 매우 친밀해지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대인 관계]

 

11. 가장 심원한 의미에서 민주적이다. 계급이나 교육제도, 정치적 신념, 인종과 피부색 등에 관계없이 자신과 잘 맞는 성격의 사람과는 누구와도 잘 지낸다. [민주적인 성격 구조]

 

12. 매우 윤리적이고 확실한 도덕 기준을 갖고 있어 올바른 일을 행하고 옳지 않은 일은 하지 않는다. 수단과 목적을 명확히 구별할 줄 알고 수단보다 목적에 마음이 끌린다. [수단과 목적의 구별, 선악의 구별]

 

13. 악의 있는 유머, 우월감에 의한 유머, 권위에 대항하는 유머에는 웃지 않는다. 그들이 유머라고 인정하는 것은 철학적이다. [철학적이고 악의 없는 유머 감각]

 

14. 특수한 창조성, 독창성 등 발명의 재능을 갖고 있다. 그 창조성은 건강한 아이의 천진난만하고 보편적인 창조성과 같은 종류다. [창조성]

 

15. 자아 실현적 인간은 다양한 방법으로 문화 속에서 잘해 나가지만, 아주 깊은 의미로는 문화에 편승하는데 저항한다. 사회의 규제가 아니라 스스로의 규제에 따른다. [문화에 편승하기를 거부]

 

특히 살펴보고 싶은 조항은 ⑤ [초월성-프라이버시 욕구]와 ⑩ [대인 관계]이다.

『장자』의 「산목」편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군자의 벗은 담백하기에 영원히 변함이 없고, 소인의 벗은 달콤하기에 오래가지 못한다.”

소인들의 교제는 자립성이 없다.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하는 상황이 되어 그 관계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질척거리며 사귀는 것이다. 필연성도 없이 그저 함께 있기 위해 함께 있을 뿐이기에 금방 끝난다.

자아실현을 이룬 사람들은 극소수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구축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 우리가 이상적인 인간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함을 알려준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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