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동네는 1962년에야 처음으로 전기가 들어와 10촉짜리 백열전구를 켤 수 있었다. 그 전 시절에는 호롱불 등잔에 의지해야 했기에 어두워지기 전에 저녁을 먹어야 한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굴뚝에서 흰 연기가 피어오르는 걸 보면 마음이 평온해 진다. 초가집 안방 윗목에는 고구마를 묻어놓은 화로가 있고 아랫목에는 감주(甘酒)가 익어간다. 작은방에서 형제들이 한 이불 속에서 뒹굴며 장난을 치던 그때가 그립다. 그리운 건 행복이다.
흐르는 시냇물을 바라보며 인생을 생각하던 여섯 살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물을 바라보니 슬프지도 않은데 까닭 없이 눈물이 흘렀다. 신기하고 기이한 경험이다. 탁영봉에서 고주박을 캐며 즐거워했던 나무꾼 소년도 눈에 선하다. 그 나무꾼 소년이 이제는 늙어서 아름다운 추억과 재회하며 이 글을 쓰고 있다.
사람은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고, 살아보니 지난 세월이 행복했다고 느끼는 것인가 보다.
가솔(家率)의 윤택한 삶을 위한 ‘보급투쟁’에서 대단한 성과를 거둔들 물질적인 행복이 얼마나 가겠는가. 눈가리개를 한 경주마처럼 옆을 못보고 앞 방향으로 달리기만 한다면 행복할 수 있을까. 돈을 목적으로 이 악물고 죽어라고 일하면 돈은 벌수 있지만, 그 돈이 오래가지 못하고 불행해질 수 있다.
자신의 건강이 나빠지거나 가정에 문제가 생기면 아무리 돈이 많아도 행복해 질 수는 없다. 살림살이 형편이 넉넉하면서, 더 넉넉하게 살려고 발버둥치는 짓은 그만두어야 한다.
일이 좋아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지만, 돈 때문에 일하는 사람은 불행하다.
노년에는 돈을 벌기 위한 일이 아니라, 남을 위한 일(奉仕)을 해야 건강하게 살 수 있다. 돈을 많이 갖고 살아온 사람이 행복한 게 아니고, 돈을 많이 베풀고 살아온 사람이 행복하다. 불평불만이 가득한 불행한 사람과 이웃을 사랑하고 가엾게 여길 줄 아는 어진 성품을 갖고 사는 사람의 얼굴표정을 비교해 보라. 얼굴은 ‘얼의 꼴’이다. 후자의 경우에서 행복한 영혼의 모습이 보인다.
마음속에 항상 사랑과 평화가 머물러야한다. 사람을 사랑할 줄 알고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무력(武力)의 상대되는 말은 문력(文力)이 아니라 문덕(文德)이다. 공자, 싯다르타, 예수 등 성현(聖賢)들은 지혜와 덕(德)으로 인류를 가르쳤다. 지행일치(知行一致), 언행일치(言行一致)의 단순한 삶에 행복이 있다. 행복하려면 자기의 분수를 알고 조촐한 삶과 드높은 영혼으로 날마다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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