慈遊到人(자유도인)

松巖 吾,謙螙. 무엇을 사유(思惟)하며 사는가?

만필 잡록(漫筆雜錄)

★ 정보*지식 갈무리

莊子(장자)에 관한 공부

松巖/太平居士 2019. 11. 10. 13:42

 

莊子(장자)에 관한 공부

                慈遊到人

  

『인생에 관하여 깊은 사색을 이끈 莊子(장자)』

 

장자는 儒敎思想(유교사상)에 따른 주류사회의 가치관, 이데올로기, 도덕과 논리에 대해 비판했다.

장자의 사상은 노자의 무위사상(無爲思想)을 계승하고 있긴 하지만. 노자가 현세와 타협적인데 반해, 장자는 그것을 완전히 초월한 자연과 융합된 인식을 갖고 있다는데 차이점이 있다.

 

 莊子 內篇(장자 내편)의 첫 번째가 逍遙遊 [ (거닐) · () · () ] 이다.  

逍遙遊(소요유)는 온 세상을 유유자적하며 즐기는 것을 의미한다. 즉 자유롭고 편하게 노닌다는 뜻이다.

()莊子(장자)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인데 노닌다는 뜻이다.

는 자유롭고 편하게, 구속받지 않는 삶의 형태이다. 규정과 규칙, 법에 동의하지 않고 속박되지 않으며 지배받지 않는다.

莊子(장자)에게 자유는 자신에게 충실한 것이다. 중요하지 않은 일을 강요당하지 않고 방해받지 않거나 혹은 제한받지 않는 것이다. 사회가 나에게 의무를 지운다하여도 가능한 구속받지 말고 규제받지 않으며 자유롭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유는 莊子의 핵심 사상이다.

莊子는 자신의 독립성이 핍박이나 속박을 당하지 않는 것을 중요시 여긴다. 그래서 모든 강제적인 것을 반대한다. 그리고 세속적으로 유행하는 것들을 반대한다.

 

輕物重生(경물중생)에서 ()은 인간의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실재적 사물 또는 느낄 수 없어도 그 존재를 사유할 수 있는 일체의 것을 말하고, ()은 신체 또는 생명을 뜻한다.

지금 이 순간 내 생이 나의 소유라는 사실은 나에게 막대한 이익이다. 무릇 장수하려면 생에 순응해야한다. 생에 순응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욕망이다.

()을 경시하고 자신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라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利己主義(이기주의)와는 다르다. 이기주의는 주로 욕망에 대한 집착과 실현을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인은 반드시 우선적으로 욕망을 조절 했다.

 

莊子 外篇(장자 외편)에서는 性命之情(성명지정)이 가장중요하고 믿을만한 것이라고 한다. 인성(人性)과 천명(天命)을 아울러 타고난 본성(本性)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모습이 性命之情이다.

() 눈 밝은 것을 좋아한다면 이는 아름다운 색깔을 탐닉하는 것이고,

() 귀 밝은 것을 좋아한다면 이는 아름다운 소리를 탐닉하는 것이고,

() 인륜을 좋아한다면 이는 사람이 본래 타고난 ()을 어지럽히는 것이고,

() 의리관계를 좋아한다면 이는 자연의 도리를 어기는 것이고,

() 예법을 좋아한다면 이는 技巧(기교)助長(조장)하는 것이고,

() 편안함을 좋아한다면 이는 넘침을 조장하는 것이고,

() 성인을 좋아한다면 이는 재주를 조장하는 것이고,

() 지식을 좋아한다면 이는 헐뜯음을 조장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타고난 성명(性命)의 정()을 편안히 누릴 수 있다면 이 여덟 가지 ·······는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타고난 성명의 정을 편안히 누리지 못한다면 이 여덟 가지는 비로소 서로 얽히고설켜서 번거롭게 흔들어 대며 세상을 어지럽힐 것이다.

장자가 말하는 본성(本性)이란 무엇일까? 본성이란 타고난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모습 性命之情이다. 오리의 다리는 짧고, 학의 다리가 긴 것이 곧 본성이다. 오리의 다리가 짧다고 길게 이어주면 괴로워하고,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잘라주면 슬퍼한다. 오리의 짧은 다리를 길게 늘리지 말고 학의 긴 다리는 잘라서 짧게 만들지 말라는 이야기이다. 만약 손가락이 6개라면 나머지 하나를 잘라버리지 말고 만약에 손가락 두 개가 붙어 있다면 그 두 손가락을 찢어놓지 말라. 즉 타고난 성정(性情)이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바꾸거나 해치려고 하면 안 된다는 의미이다.

장자는 또 백이(伯夷)叔齊(숙제)는 명예를 위해 수양산(首陽山)에서 죽고, 도척()은 이욕(利慾) 때문에 동릉산(東陵山)에서 죽었지만 목숨을 해치고 본성을 상하게 한 점에서는 두 사람이 다를 것이 없다고 했다.

본성에 따라 사는 삶이란 태어난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삶을 사는 것이다. 무엇을 의도하고, 꼭 이루어지길 바라고, 고집하는 삶은 자연스러운 삶이 아니다.

삶은 결코 의도하고, 꼭 이루어지길 바라고, 고집하는 대로 살아지지 않는다. 오히려 삶의 일상은 저절로 일어난다. 우리가 현실에서 겪는 삶의 고통은 대부분 이처럼 저절로 일어나는 삶의 일상을 어찌하려고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살아가면서 고통이 느껴지면 그 고통이 어떤 갈등에서 일어나는지 돌이켜 살펴보라. 그러면 다만 홀연히 일어나는 생각일 뿐, 그 일어난 자리에는 고통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음을 알게 된다. 교육이란 사람들이 본성에 따라 자연스럽게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다.

 

쓸모 없음쓸모 있음이란?  

이상한 주제 같지만 莊子(장자)를 이해하는 핵심이다. 또한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것은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장자는 평소에 하는 말이 지나치게 역설적이거나 추상적이어서 현실성이 결여되었다는 지적을 받았다.

쓸모없음을 알아야 비로소 쓸모있음을 말할 수 있는 법이다.

무릇 땅은 넓고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지만 걸어 다닐 때 사람에게 쓸모 있는 땅은 발이 닿고 있는 부분뿐이다. 그렇다고 발이 닿는 부분만 남겨놓고 그 둘레를 모두 파서 없앤다면 그래도 발이 닿고 있는 좁은 땅이 쓸모 있는 것일 수 있겠는가? 그리하면 좁은 땅 역시 쓸모가 없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쓸모없는것도 쓸모있는것임이 분명하다.

 

()를 말하는 사람은 도()를 알지 못한다

나는 그대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소.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헤아리면 도()를 알 수 있겠소?

어떤 곳에 살고 어떤 일을 하면 도()에 안주할 수 있겠소?

무엇을 따르고 무엇을 본 받아야 도()를 얻을 수 있겠소?”

질문을 반복하였지만 A道士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A道士는 사실 대답할 줄을 몰랐다.

같은 질문을 B道士에게 물었다. “그건 내가 알고 있소. 내가 그대에게 말해 드리리다.” B道士는 말을 꺼내려다가 문득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를 잊어버리고 더 말을 잊지 못했다.

B道士에게도 답을 얻지 못한 채 C道士에게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아무것도 생각지 않고, 아무것도 헤아리지 않아야 도()를 알 수 있소.

사는 곳이 없고 하는 바가 없어야 도()에 안주할 수 있소.

따르는 것이 없고 본받을 것이 없어야 도()를 얻을 수 있소.”

C道士에게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이제 나는 도()에 대해 아는 것이지만 저 AB 道士들은 정말로 모르는 것이오?” 이에 C道士가 대답하였다. “A道士야말로 진짜로 도()를 아는 사람이며, B道士는 도()에 가깝다고 할 수 있소. 하지만 나와 그대는 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오. 그러기에 참으로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그것을 제대로 모르는 자요. 그러므로 성인(聖人)은 말없는 가르침을 행한다.’고 하는 것이지요.

 

莊子 雜篇(장자 잡편) 庚桑楚(경상초) 虛則 無爲而 無不爲(허칙 무위이 무불위) 마음을 비우면 억지로 하지 않더라도, 하지 않은 일이 없게 된다. 틀에 얽매이지 않고 생각 가는대로 하라. 그러면 안 되는 일이 없다.

無爲而 無不爲(무위이 무불위)는 일을 하는 과정에서

표 내지 말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소리 소문 없이

적절하게 하라는 뜻이다.

첫째 표 내지 말라는 것은, 그 뜻이나 과정이나 결과 등에 대해서 과대 포장하여 떠벌이지 말고 자랑하지 말며 우쭐대지도 말라는 것이며

둘째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하라는 것은 시기·질투심을 불러일으키는 능력 밖의 일을 도모하다가 사고·질병·죽음 등을 초래하지 말라는 것이며

셋째 적절하게 하라는 것은 걱정 없이 오래오래 살고자 하는 가장 근원적인 욕구충족을 방해하지 않는 테두리 안에서 하라는 것이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결국 갖가지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활동에 지나지 않지만, 어떠한 활동이든지 간에 의도하거나 기도(企圖)하지 않는 것처럼 드러나지 않게 조용히 하라는 뜻이다. 설령 겉으로 드러났다 하더라도 겸손해야 한다.

이를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욕심이 없이 유유자적하면서, 억지로 일하지 않고, 삶에 만족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가되 늘 무언가를 생각하고 행하되, 그것의 결과는 주변사람들과 조화를 이루고 균형을 유지하여 일신상으로 안전한 생활을 추구하라는 뜻이다.

 

莊子 雜篇(장자 잡편)을 보면 盜跖(도척)은 자신의 주장을 굳게 내세운다. '세상의 존경을 받는 사람들도 잘 생각해 보면, 모두 이익에 눈이 어두워 스스로 본성(本性)을 배반하였다. 공자의 가르침은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린 것이다. 공자는 도척보다 위선자이다.'라고 말한다.

 

공자(孔子)盜跖(도척)을 설득하러 갔다.

공자의 설득에 격노한 도척은

내가 어리석은 백성이라면 모르지만, 이익에 동요되고 달콤한 소리에 넘어갈 것으로 생각하시오? 그대가 말하지 않더라도 벌써 알고 있소. 남이 보는 앞에서 아첨하는 자 넘치고, 숨어서 험담하지 않는 자가 없는 세상이오. 감언이설로 온 천하를 고스란히 준다고 해도 그런 것이 어찌 영구히 보존 되겠소. 옛 나라 황제는 천하를 지배했지만, 자손은 송곳 하나 세울 땅이 없었고 결국 자손들은 대가 끊어져 없어지고 말았소. 큰 이익일수록 잃기 쉬운 법이오. 태고에는 땅 위에 짐승들이 활개치고 사람의 수가 적어서 나무 위에 집을 짓고 짐승을 피하며 살았어요. 일부일처제도 없었고 입고 먹는 것을 자급자족하며 남을 희생시키는 인간은 없었지요. 이것이 인간 본래의 생활 방식인 것이오. 그런데 그대가 추켜올리는 황제들은 제국을 만들어 들판을 피바다로 만들었고, 상하의 신분제도를 만들었소. 그 이후부터 모든 지배자가 백성들을 희생 시키고, 강자는 약자를 죽이고, 다수는 소수를 억압하게 되었어요. 그런데도 그대는 그들의 도(道)를 배워 학자세계의 권위자가 되어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소. 남의 이목을 현혹시키는 말과 행동으로 여러 나라의 왕들을 속이며 명성을 손아귀에 넣으려고 하니 그대 공자보다 큰 도둑은 세상에 없는 것이오. 그런데 세상에서는 나 盜跖을 큰 도둑이라고 하고, 그대 孔子를 큰 도둑이라고는 하지 않으니, 이런 바보 같은 일이 또 어디 있겠소.” 도척보다 공자가 사회에 끼친 해가 더 크다고 한 것이다.

 

어진 삶으로 불린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벼슬자리를 사양하고 수양산에서 굶어 죽자 시체는 산속에 버려진 채로 있었소. 포초(鮑焦)는 속세를 등지기는 하였으나 그 결과로 나무를 안고 죽었어요. 신도적(申徒狄)은 간언(諫言)해서 듣지 않자 돌을 지고 물로 들어가 고기의 밥이 되었지요. 개자추(介子推)는 진실한 사람으로 문공(文公)에게 자기 허벅다리 살을 떼어 먹였으나 문공(文公)이 자기를 모른 척하자 화가 난 나머지 문공(文公)을 버리고 떠나 나무를 껴안은 채 불에 타 죽었고, 미생(尾生)은 여자와 만나자는 약속을 지키려고 다리 밑에서 물이 점점 불어나도록 기다리고 있다가 빠져 죽고 말았어요. 이 사람들의 참혹한 죽음은 나무에 못 박혀 죽은 개나, 물에 빠져 죽은 돼지와 다를 것이 없으니, 모두 이름에 사로잡혀 생명을 함부로 한 것이오. 생명을 소중히 하는 것이 세상 만물의 근본 이라는 것을 생각지 못한 것이지요. 그대가 만일 인간을 초월한 세계에 관해 이야기를 할 생각이라면, 그것은 내가 알 바 아니오. 하기야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겠지만, 그거라면 지금 내가 말한 것에 더 보탤 것이 없을 것이오. 그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나 盜跖은 벌써 다 알고 있소.” 현인(賢人)들도 본성(本性)을 위배했던 사람들이라는 주장이다.

 

伯夷(백이) 叔齊(숙제) : ()나라 말기의 형제(사마천 사기열전 백이열전)

鮑焦(포초) : 춘추전국시대 주()나라의 은자(隱者)

申徒狄(신도적) : ()나라의 은자(隱者)

介子推(개자추) : () 문공(文公)의 신하

미생(尾生) : 춘추전국시대 노()나라 사람

 

이번에는 내가 인간의 자연스러운 정리(情理)에 대해 가르쳐 주겠소. 누구나 아름다운 것을 보고 싶어 하고, 좋은 음악을 듣고 싶어 하며,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어 하고, 편안한 기분으로 살고 싶어 하지요. 사람의 수명은 오래 살아야 여든, 짧으면 예순인데, 그나마 걱정과 그 밖의 병 없이, 진심으로 즐거운 웃음을 웃을 수 있는 날은 한 달에 고작 몇일 될까말까요. 우주는 영원한 것이지만 인간의 생명은 한계가 있소. 우리는 유한한 생명을 영원한 우주에 의지하고 있는 것이오. 인생은 마치 달리는 말을 문틈 사이로 보는 것처럼 극히 짧은 순간에 불과한 것이지요. 이 찰나의 일생에서 정신을 충족시킬 수도, 삶을 평온(平穩)히 할 수도 없는 사람은 도()를 체득했다고 할 수 없소. 그런 사람의 주장에 귀를 기울일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날이 어둡기 전에 빨리 돌아가시오. 다시는 나를 찾아와 지껄일 생각을 말란 얘기요. 아시겠소? 그대가 주장하는 도()는 본성(本性)에 위배하여 만들어낸 엉터리라는 걸 깨우치시오.”  공자의 도()는 본성(本性)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도척(盜跖)에게 기가 질린 공자(孔子)는 깊숙이 머리를 숙이고 물러 나왔다.

눈앞이 캄캄해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마차에 의지해 돌아오며, 공자(孔子)는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내가 겁 없이 호랑이에게 달려가서 수염을 잡아 뽑으려했소. 호랑이에게 물렸다 해서 조금도 이상할 게 없소.”

 

대우를 받는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며, 사람들이 따르도록 하는 것은 좋지 않다

스스로 자신을 버리지 못하는 한, 세상이 편하게 가만 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지혜와 재주를 부리는 사람은 몸과 마음을 시달리게 할 뿐, 아무 얻는 것이 없이 일생을 마친다. 그러나 무능을 자각하고 있는 사람은 일체의 욕구에서 벗어나 배를 채우는 것만으로 만족하며, 마음편한 생활을 즐기게 된다. 물결 따라 흔들리는 작은 배처럼 나라는 것을 버리고 자유의 경지를 거닐게 되는 것이다.

 

죽음은 자연스러운 우주의 순환이다

莊子(장자) () 이 세상이 원래 아무 것도 없었으나 어느 순간 그런 모호하고 제대로 보이지 않는 무엇인지도 모르던 세상에서 ()’가 생겨났고 ()’가 생기고 나서 형체가 생겼다. 형체가 생기고 나서야 여러 생명체들, , 나무, 돌들이 생겨났고 그리고 사람이 생겨났다. 사람은 대자연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죽으면 다시 대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사람의 생명은 자연의 순환 중의 한 단계이다. 우주의 일부분이 되어 다시 다른 것이 될 수도 있다. 자연적 과정에서 삶과 죽음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의미이다. 이는 변화와 연결되어 있다. 생명이 없다가 생명으로, 다시 죽음으로 이어지는 일이 자연스럽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평생을 동고동락하던 莊子(장자)의 부인이 숨지자 절친했던 친구가 문상을 왔는데 莊子(장자)는 아내의 주검을 앞에 놓고 젓가락 장단에 맞춰 흥겹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친구가 "이보게, ()을 하지 않겠다면 그건 좋아. 하지만 젓가락을 두들기며 노래까지 한데서야 너무 심한 것 아닌가."

莊子(장자) () “집사람이 막 죽었을 때 사실 나도 슬펐다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그게 아니더란 말일세. 집사람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형체도 없고 모습도 없지 않았었나. 그러다 어떻게 하여 모습을 갖추고 이 세상에 나왔던 것이네. 그러다 때가 되어 주검이 되었고, 저 주검도 세월이 지나면 모습도 형체도 없이 사라지겠지. 결국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 아닌가. 이게 자연의 이치인데 그런 자연의 이치를 슬퍼하고 거부하고 저주할 필요가 있겠는가. 겨울이 가면 봄이 오고,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춘하추동 사계절이 무한히 반복되듯 우리의 생명도 이렇게 돌고 도는 것일세.

이런 데 생각이 미치자 내가 통곡을 하는 것이 갑자기 우스워지더란 말일세.

그래서 웃음이 나왔고, 웃다보니 즐거워 젓가락 장단에 맞춰 노래를 하고 있었던 것이라네.”

 

莊子(장자)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달관(達觀)된 모습을 보였다.

제자들이 스승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고 나름대로 성대한 장례식을 치르려고 부산을 떨었다.

莊子(장자)가 제자들에게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

내가 죽으면 그냥 들판에 버리거라. 하늘과 땅이 내 관이요, 해와 달이 부장품이며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은 수의로다. 산천초목과 들짐승 날짐승이 모두 조문객이 되겠으니 더 이상 준비할 것도 말 것도 없느니라.”

장자에게 배웠으면 스승의 뜻을 능히 짐작했으련만 그러나 제자들은 그래도 예의를 지키겠다고 "선생님, 그래도 관은 하나 준비하렵니다. 그냥 내다 버리면 독수리 까마귀들이 와서 쪼아 먹지 않겠어요."

莊子(장자)는 웃으며 말했다.

관에 넣어 땅속에 묻으면 개미나 땅강아지들이 들어와 뜯어먹지 않겠느냐. 결국 누가 먹든 같은 것이다. 뭐 하러 고생하며 관을 사서 돈을 쓰고 땅을 파서 묻느라 신경 쓰느냐. 독수리 까마귀가 먹을 것을 빼앗아 개미나 땅강아지에게 주어야 마음이 시원하겠느냐. 인간이란 죽으면 결국 형체도 없이 분해가 되는 것, 굳이 그럴 필요 없느니라. 그냥 들판에 갖다 버리거라. 이것이야 말로 성대한 장례인 것이다.” 라고 하였다

여하튼 莊子(장자)는 자신의 죽음마저도 이렇게 웃으며 맞이했다.

그의 삶은 웃으며 살다가 웃으며 끝이 났다.

 


慈遊到人思惟

자유인은 삶에 집착하지 않고, 죽음을 기피하지 않는다.

세상에 태어났음을 기뻐하지 않고, 세상을 떠난다고 슬퍼하지 않는다.

무심히 왔다가 무심히 갈 뿐이다.

자신을 자연현상의 하나로 보고, 죽음에 개의치 않는다.

주어진 삶을 즐기다가, 죽을 때가되면 일체를 망각하고 자연으로 되돌아간다.

결국 인간이라는 것은 자연의 하나이므로 이 자연에 어긋나지 않게 자연 그대로 사는 것이 좋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나는 나의 아무런 노력도 없이 그냥 태어났다.

그냥 살면 된다.

그냥 살다보면 나의 아무런 노력 없이도 그냥 죽을 것이다.

그러니 심각해질 이유가 없다.

죽은 뒤의 걱정은 하지 말고, 살아있는 동안 즐겁게 지내자.

 

 

무심히 순응할 줄 알아야 한다

굳이 한 쪽에서 빼앗아 다른 쪽에 준다는 것은 공정한 처사가 아니다. 또한 인위적으로 공정을 꾀하는 것은 공정이 될 수 없으며, 의식적으로 자연에 순응하려는 것은 참다운 순응이 아니다. 자신의 영리함을 믿고 지혜를 쓰면 도리어 사물의 지배를 받게 되지만, 참다운 지혜를 가진 사람은 그저 무심히 사물에 순응할 뿐이다. 결국 자신이 영리하고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참다운 지혜를 가진 사람을 따를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이치를 모르는 사람들은 자기 판단에 얽매여 재주를 부리며, 끝내 속박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 이보다 슬픈 일이 어디 있으랴?!

 

()는 원래 하나이다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이렇다하고 내세우는 학파가 많다. 그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의 학술이 제일이며, 거기에 덧붙일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옛사람들이 도()를 전하는 근본적인 학술이 과연 있다는 말인가? 그보다는 도() 자체가 보편적인 것이므로 어디에나 있다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의 명백한 현상(現象)이 구체화되며, 성인이 출현하는 것은 하나()’인 도()에 바탕을 두고 있을 뿐이다.

 

장자(莊子)의 위대함

장자(莊子)의 저서는 규모가 웅대하고 상식적인 사고를 초월한다. 그의 논술은 자유자재여서 남을 해치지 않는다. 그의 표현은 신출귀몰하며 기기괴괴해서 파격적인 재미가 있다. 위로는 조물주와 함께 놀며, 아래로는 생사를 벗어나고 시간을 초월한 자와 벗하는 것이 그의 경지이다. 이를테면 신선(神仙)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현상계의 진리를 해설할 때 무한한 변화를 다 구명(究明)하지는 못하였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장자(莊子) 역시 숙제를 남긴 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장자(莊子) : BC 4세기에 활동한 도가(道家) 초기의 사상가

전국시대 송()나라 몽()에서 출생

유교사상가인 맹자와 동시대 사람